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슬람 황금기 (문단 편집) == 설명 == [[파일:다마스쿠스 보물고2.jpg]] 압바스 왕조기에 세워진 [[다마스쿠스]] 우마이야 대사원 내부의 보물고 이슬람권은 문화권과 종교에 상관없이 자신한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은 무엇이든 배워서 더욱 발전시켜나갔고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비 무슬림 학자들도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할 수 있는 융통성있는 사회였다. 특히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, 로마 시대의 유산을 계승한 지적 결과물들은 서유럽 세계로 번역되어 [[르네상스]]에 영향을 주었다. 당시 무슬림들은 '''이교도'''라고 할지라도 필요하다 싶으면 타민족의 지식을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. 이때가 타 문화권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고 수용했던 때라 [[이슬람 근본주의]]에 휘둘리는 21세기 중동보다 더 낫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. 중세 전반기의 혼란을 겪으며 학문적으로 비교적 쇠퇴한 동서유럽에 비해[* 그나마 구 서로마 제국권에 비해 동로마 제국은 수준 높은 문화를 유지하긴 하였으나 이 시기 이슬람 제국인들에게 무지무식하다고 무시받는 신세는 면하지 못했다. 그나마 '로마인'들은 수공예와 군사학은 쓸만하니 그마저도 별볼일 없는 '짐승'같은 서구인들보다는 낫다고 여겼으나, 당연히 '로마인'들은 이에 대해 분개했다. 이 당시 이슬람 제국 사람들이 '로마인'들에게 당신들은 '그리스인'으로 보기엔 너무 무식해서 그리스인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얘기했기 때문이었다. 그들이 인정하는 '그리스인'들은 이슬람 제국 내 그리스인의 후예들 뿐이었다.] 아랍의 이슬람 문화권은 고대 그리스, 로마의 학문들을 받아들여 매우 발전되어 있었다. 위상이 이렇다보니 서구권의 교회에서도 [[이븐 시나]], [[이븐 루시드]] 같은 무슬림 저자의 주해서를 읽을 수 있게 허용했다. 당장 알코올과 알칼리, 알고리즘 등의 단어가 아랍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.[* 연금술을 뜻하는 'alchemy'와 대수학을 뜻하는 'algebra'는 모두 아랍어에서 온 말로써, 각 단어의 앞에 붙은 'al-'은 아랍어에서 정관사 the의 의미로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.] 이 시기 이슬람은 이성을 중시하는 [[무타질라 학파]]의 융성으로 인해 대놓고 '''[[이신론]]이나 [[불가지론]]을 선언해도 처벌받지 않는'''[* 단, '''무신론'''만큼은 이 시기에도 절대로 용납받지 못했다. [[무신론]]과 [[이신론]]은 엄연히 다르며, 당시 무슬림 학자 중에서는 [[불가지론]]을 대놓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어도 대놓고 무신론자인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. 중세 아랍어에서 [[마니교]]도를 지칭하던 진디끄, 잔다까라는 단어가 시대가 지나면서 무신론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. 이슬람 황금기에도 무신론자라는 비판은 심각한 표현이었고, 중세 이슬람권 인물 중 거의 유일하게 무신론자로 확정된 사례인 이븐 알 라완디의 경우도 여든 살이 넘어 죽기 직전에 자신이 무신론자인 것을 밝혔다. 현대 그나마 이슬람권 국가 중 세속화가 잘 되었다는 [[튀르키예]]에서도 무신론자라는 단어는 욕설에 해당한다. 당시 이슬람권에서 무신론이 관용되었다는 것은 중세 아랍어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해된 것으로 보인다. 물론 유럽권에서도 무신론자가 차츰 용납받기 시작한건 [[계몽주의]] 시대때인 최소 17-18세기때부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...] 매우 관용적인 사회였고 과학, 철학, 사회 등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인 발전을 이루었다. 당시 동로마 제국은 6~7세기 [[유스티니아누스 역병]]의 여파로 식자층이 대폭 감소하여 한동안 제국 영내에서 [[라틴어]]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해 [[로마법 대전]]을 독해하지 못하는 처참한 상황이었고, [[중세]] [[유럽]] 대부분 지역에서는 [[바이킹]]의 침략이나 잦은 전쟁으로 피로해져있는 상태였으며 [[중국]]은 [[당나라]] 말기 ~ [[5대 10국]]시대로 정복전쟁과 내전으로 한참 바쁠 때였다. 이슬람권의 대표적인 도시 [[바그다드]]만 해도 사람들 사이에 지성의 요람,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워 세계 3대 도시에 등극하는 위엄을 보여준다. 특히 바그다드와 카이로에 세워진 [[지혜의 집]]은 중세 지중해 권역과 페르시아, 인도의 학문이 집대성된 곳이었고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시칠리아, 스페인, 모로코, 알제리 등 (당시 기준으로) 이슬람 지역의 학교에서 천문학, 철학, 수학, 화학 등을 공부하기도 하였다. 그중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[[피보나치]]. 특히 상류층이 지식 추구를 주도했는데, 대표적으로 칼리파 [[알 마문]]은 정확한 지구 둘레 측정을 위해 [[에라토스테네스]]의 실험을 이라크 북부 [[신자르]]의 사막에서 재현하기도 하였다. 이때 측정된 지구 원주는 16세기 전까지 가장 정확한 측정값이었다. 게다가 이에 대해 후대의 석학 [[알 비루니]]가 자신의 저서에서 지구의 원주를 재려고 발품을 팔 필요가 없다고 빈정거릴 정도로 수학과 천문학은 특히 발전되어 있었다.[* 지구 원주 측정은 간단한 관측과 기초 삼각함수면 된다는 것이다.] 애초에는 정확한 기도 시간과 라마단 기간, 메카 방향 측정 등 지극히 종교적 목적에서 비롯된 수학·천문학은 이슬람 과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. 이슬람권의 대도시의 대모스크 주변은 마드라사 (대학), 비마리스탄 (병원), 마크타브 (도서관) 등의 공공 시설이 세워져 복합단지를 이루었다. 그중 [[비마리스탄]]에서는 종교와 민족, 성별, 나이,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'''무상으로''' 의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. 이러한 보편적 복지는 재력가나 권력자들이 기금을 투자한 와크프 (재단)에 의해 정부와는 별개로 가능하였다. ||[[파일:1154_world_map_by_Moroccan_cartographer_al-Idrisi_for_king_Roger_of_Sicily.jpg|width=400]]||[[파일:Diagrammatic_T-O_world_map_-_12th_century.jpg|width=300]]|| || 1154년의 알 이드리시 지도[* 지도의 윗쪽이 남쪽이다] || 12세기 서유럽의 TO 지도 || 그 외에 시칠리아 왕국의 로제르 2세의 부탁으로 제작된 알 이드리시 지도도 이슬람 지리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고 그 지식은 바닷길을 통해 조선의 [[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]]에도 영향을 주었다. [[칠정산]] 역시 이슬람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. 15세기 [[르네상스]] 이전까지 유럽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의학서 역시 이슬람권의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한 것에 불과하였으며, 서유럽의 과학은 [[레오나르도 다빈치]]와 [[갈릴레오 갈릴레이]] 이후에야 이슬람 학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. 르네상스 외에도 알 이드리시 지도 등에 나타난 인도양의 개념은 서구의 대항해시대 개막에 영향을 주었다. 기존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 따라 아프리카와 남극이 이어져 인도양이 지중해 형태인줄 알았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